첼셔
긴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강물은 색을 알 수 없었다. 차가워진 날씨에 유난히 사람이 적었다. 낙엽이 발아래에서 바스락거렸다. 화려해 보이지만 모든 것이 생기를 잃어가는 계절이었다. 이번엔 정말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윤기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강물이 자신의 모든 우울까지 집어삼킬 듯하다. 조금씩 발을 앞으로 움직였다. 심장은 조금씩 속도를 높여간다.
움직이는 폐 안으로 차가운 물이 들어찬다.
몸에 남아있는 공기 한 방울마저 빠져나가자 몸은 쉽게 가라앉는다.
한참 쿵쿵거리던 심장은 한 순간에 멎어버린다.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석진의 전화다. 또 김석진이다. 윤기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핸드폰 뒷면에 자잘한 금이 갔다. 모든 상상은 깨져버렸다. 완벽한 계획은 끝나버렸다. 또 석진이었다. 여전히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또, 석진이었다.
w. 첼셔
윤기의 오른팔에 가득했던 짐을 석진이 건네받는 몸짓이 자연스러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성큼 발을 내딛은 둘 앞으로 사람들이 가득 찼다. 석진은 윤기 쪽으로 가까이 붙어 등을 연신 토닥여주었다. 깊이 들이쉬곤 내쉬길 반복하던 윤기의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긴 손가락이 허리에 닿았다. 움찔거리는 몸에 급하게 손이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의 허벅지를 향해 있던 시선은 발치로 내려갔다.
짧은 정적이 느리게만 흘러갔다.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멈추고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한없이 긴 영화처럼 지나갔다.
띵.
주차장에 멈춰 열린 문 사이로 석진과 윤기가 나갔다. 주황색 불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사이드미러가 돌아갔다. 역시 또 하나의 익숙한 손길로 조수석의 문을 열어 윤기를 앉혔다. 운전석에 앉은 석진이 말없이 핸들을 잡았다.
넓은 캠퍼스 주차장을 지나 서울 도로 한복판에 다다랐다. 시선 끝에 자리한 윤기는, 이미 부풀어 오른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옆을 의식한 윤기가 무슨 일 있냐는 듯 석진을 쳐다보자 곧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손끝부터 팔을 타고 윤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석진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어디를 바라보던 그 끝은 민윤기.
석진은 윤기가 안쓰러웠다.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절대 속을 드러내는 법이 없기에 더더욱 걱정되고 매달리게 되는 것이었다. 윤기는 단단한 껍데기로 속을 가리고 차가운 척을 하는 부류였다. 그 껍데기가 깨지면, 속은 한없이 무른, 상처에 면역이 없는.
붉은 신호등이 색을 바꿨다. 긴 다리가 있다. 그 아래로 회색인지 파란색인지 모를 물이 가득 하다. 윤기는 오른쪽 손목으로 턱을 괴고 창문에 몸을 기댔다. 간간히 뱉어지는 숨에 창밖의 풍경이 흐릿해졌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파란색 필터를 씌운 듯 온통 새파랗고 우울한, 익숙한 풍경이다.
깊어진 계절에 주위가 금세 어두워졌다. 복잡한 서울 시내를 지나 외곽으로 들어가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동네가 있다. 석진과 윤기가 사는. 석진은 윤기의 집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가로등 몇 개를 지나면 윤기의 집이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그 길을 윤기는 오늘따라 멀찍이 걷는다.
하늘이 채도 낮은 파란색에서 연한 남색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길가에 갈색의 낙엽이 쌓였다. 두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낙엽이 밟혔다. 석진의 손이 윤기의 허리에 닿았다. 아니, 닿을 뻔했다. 온전히 그러지 못한 것은 윤기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내뺐기 때문이다.
“아, 미안...”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석진의 어깨가 금세 가벼워졌다. 윤기는 석진에게 당황할 잠깐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벌써 저 멀리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석진은 씁쓸함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저절로 손이 간 것이라곤 하지만 석진에겐 나름 용기내서 한 행동이었다. 단번에 팽개쳐진 마음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윤기는 원체 내성적인 사람이라곤 해도, 제 할 말은 바로 내뱉어버리는 성격이었다. 나름 친하다고 하는 지민과 태형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직설적인 행동이 가끔은 남에게 상처를 주곤 했다. 석진에게는 예외였다. 누구보다 자신을 오래 알아온 석진을 언제부턴가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애매하게 거리를 두려고 해도 석진 혹은 자신이 다가가게 되었다.
석진은 언덕 위의 작은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문이 열릴 것 같은,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착각 때문이었다. 역시 오늘도 다를 게 없었다. 석진을 비웃듯 머리 위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윤기를 병원에 데려간 것은 다름 아닌 석진이었다. 윤기는 거짓말에 서툴렀고, 석진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을 본 이후로, 석진은 왠지 모를 이유에 윤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무언가 석진의 발목을 잡았다.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왔던 감정을 더 이상 부정하기 힘들었다.
동기 중 한 명이 건넨 책은 손에 닿자마자 힘없이 떨어졌다. 괜찮냐고 연신 물어오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댔다. 석진은 평소보다 하얗게 질린 윤기를 데리고 급하게 나왔다. 큰 반항 없이 윤기는 순순히 석진의 손에 붙잡혀졌다. 허리를 감싸는 손을 그때만큼은 거부하지 않았다.
사실, 아주 약간은 고마웠다. 석진 앞에선 안절부절 못하는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안아줬으니. 석진이 제 손을 붙잡고 다독여주는 내내 윤기는 떨리는 심장을 감출 수 없었다. 윤기는 익숙한 조수석에 타서도 저에게 쏟아질 질문들에 어떻게 답할지 애써 생각 중이었다. 그렇다 할 이유도, 목적도 없는 일이었다. 석진을 걱정 시키지 않고 답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 큰 사거리에 멈춰선 차 안에는 고요함만 가득했다. 유난히 심장이 크게 뛰는 듯 했다. 가슴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발끝까지 울려댔다. 차라리 이 공간에 아무도 없길 바랐다. 석진이 없었으면 했다. 석진과 있을 때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이 싫다.
“나 너희 집에서 자고 갈래.”
예상과 달리, 석진이 내뱉은 말은 우습게도 그게 다였다. 다섯 단어가 머릿속에 어지럽게 맴돌았다. 시커멓게 물든 남색 하늘을 그저 쳐다보았다. 내장이 꼬이는 느낌이다. 석진 앞에 서면 언제나 그렇듯 느꼈던, 불쾌한 느낌. 그럼에도 떠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증오. 윤기는 다시 한 번 짧은 문장을 곱씹었다.
나
너희
집에서
자고
갈래.
윤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석진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뻔뻔하게 문 앞에 섰을 때도, 윤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곪은 상처에 따가운 소독약을 바를 때도, 석진이 저가 밀어낼 때까지 따뜻하게 안아줬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었다. 석진이 문을 닫고 조명을 켜기 전에 재빨리 눈물을 벅벅 닦았다.
“대체 왜 우리 집에서 자요.”
“그냥,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석진은 냉장고를 뒤진다. 예상과 다를 것 없이, 비닐봉지 몇 개와 용기에 담겨져 있는 남은 음식뿐이다. 여기가 사람 사는 집이냐. 집을 한 바퀴 훑어본 석진이 한탄하는 듯 말했다. 곧 벽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라면 두 봉지를 꺼냈다.
“그거 먹고 가요.”
“싫어.”
“여기 내 집인데.”
진작에 밀어낼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무뚝뚝한 듯 애매한 행동들이다. 석진에겐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런 행동들이 나오게 되었다. 최대한 마음에 없는 말 무심하다는 듯 밀어내고 싶었다. 아니, 그냥 그런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밀어내는 척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진짜로 가?”
물에 라면 두 개를 넣으며, 석진은 물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윤기가 몇 번이고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그 눈이다. 어지럽게 깊은 갈색.
“그러던가.”
“안 가.”
석진은 겨우 찾아낸 젓가락 몇 개를 대충 집어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다 끓은 라면을 식탁 위로 올려놓았다. 윤기는 고개를 사선으로 돌리고 있었다.
“너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윤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산다는 소리만 들어도 끔찍하게 요동치는 머리를 잠재울 수 없었다. 석진의 과도한 정성과 친절이 부담스럽다. 몇 마디 더 중얼거리는 미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석진이 컵에 물을 따르곤 윤기에게 건넸다. 윤기는 손에 잡힌 컵을 바닥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양 손이, 곧 온몸이 덜덜 떨렸다. 끔찍한 파열음에 머리가 찢어질 듯 했다. 투명한 유리조각과 물이 뒤섞인 채 방바닥 여기저기를 나뒹굴었다.
“윤기야,”
형은 왜 그래요. 왜 죽고 싶은 사람을 끝까지 살리려고 끌어내요. 그 지랄 또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시발, 내가 언제 살려달라고 그랬냐고. 누가 그렇게 신경 써달라고 했어요? 나 그냥 좆같이 살다가 뒤져 버리는 게 소원인데 왜 끝까지 사람 비참하게 만들어요?
손이 뜨끈했다. 자주 느껴본 감촉이다. 끈적거리는 뜨끈한 액체. 바닥이 한껏 밀어낸 유리조각이 손가락을 찔렀다. 눈도 뜨끈했다. 온몸이 젖는 느낌이다. 끔찍하게 힘이 빠졌다. 심장은 아까처럼 빠르게 뛰지 않았다. 여전히 그 주인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처럼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느리게 움직였다.
이제 다시는 석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완벽하게 끝내버렸다. 모두 윤기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완벽한 결말이다. 혼자 가슴 졸이던 감정은 자신의 손으로 처참하게 끝나버린 것이었다. 그저 이대로 죽어도 자신을 붙잡을 석진은 더 이상 제 곁에 없을 것이다.
석진의 손가락이 유리조각 사이를 헤집었다. 손에 가득 조각들이 담겼다. 윤기의 손처럼 석진의 것도 떨렸다. 뾰족하게 날이 선 조각 중 하나가 떨리는 손바닥을 그었다. 투명한 유리 아래로 비치는 살을 선홍빛 액체가 덮었다.
석진은 순탄한 내리막길을 걷는 윤기의 삶을 가로막고 비틀었다. 윤기의 모든 계획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목이 찢길 듯 아팠다. 눌러 담은 울음이 목구멍을 비집고 토해졌다. 석진은 윤기를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몸을 두 팔로 한껏 껴안았다. 윤기의 두 손이 아무리 밀어내도 좀처럼 밀려나질 않았다. 가라앉았던 심장이 머릿속의 적신호와 함께 위태롭게 뛰었다. 살아있는 심장은 온몸에 피가 돌게 했다.
윤기의 어깨가 젖었다. 석진의 분출된 감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만해요.”
막힌 울음이 한 차례 더 토해졌다.
“왜 그러냐고, “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고?
석진이 윤기의 어깨를 밀쳐냈다. 몸에 가해진 힘에 윤기는 뒤로 몇 발짝 뒷걸음치며 비틀거렸다. 석진의 얼굴이 번지고 일그러진다. 힘없이 늘어진 손에서 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사랑해.”
“사랑해 윤기야,”
“근데, 이렇게 말하면, 네가 사라질 것 같았어. 조금만 더 다가가면 되는데,”
석진은 눈물을 닦지 않았다. 애써 삼키는 울음이 짜기만 했다. 이런 식의 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스스로 이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말일 뿐이었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두 손으로 밀쳐내고도 말하게 되는 감정이었다. 꽉 쥐면 부서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만 같은 사랑이었다.
“근데, “
윤기야,
나는
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한참을 돌아도 끝은 민윤기.
석진은 애써 윤기를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유리창에 비쳐진 윤기의 모습이었다. 석진은 윤기와 겹쳐지고 멀어지다 결국엔 다시 돌아올 운명이었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스스로 갇힌 거다.
팔 한 뼘의 거리를 남겨두고 석진과 윤기는 소파 위에 앉았다. 석진은 길게 숨을 쉬었다. 적막이 새파랗게 텅 빈 하늘 마냥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윤기는 다리를 떨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엔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가락에서 짭짤한 맛이 났다. 석진은 간간히 깊은 숨을 내뱉을 뿐, 초조한 감정을 비추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윤기였다.
“나는 형이 나 사랑하는 거 싫어요.”
“...”
“그런 식으로 의미 생기는 거 싫어요. 형이 나 더 이상 안 사랑한다고 말하는 생각만 해도 죽을 것 같아서 무서워요.”
“그럴 일 없,”
형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내가 무서워요.
그렇게 뭐라도 붙잡게 되는 게 싫어요.
나는 형 때문에 못 죽는 게 싫어요.
윤기는 울지 않았다. 석진을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력이 빠져 울 힘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이 뜨거워졌다. 석진의 눈은 꾸준히도 눈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우는 두 눈이 가까워졌다. 갈색의 눈에 여러 빛깔이 섞여있었다.
“사랑해.”
네가 나 때문에 못 죽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라도 붙잡았으면 좋겠어.
네가 나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나, 사랑해주면 안 돼?
여태껏 이렇게 가깝게 맞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뜨거운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랫배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이상한 느낌으로 가득 찼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울렸다. 석진은 여전히 아픈 눈을 하고 윤기를 바라봤다. 이상한 몇 번을 마주해도 면역이 생기지 않는 눈이었다.
어지럽게 두 사람을 흔들어 놓았던 어젯밤과는 다르게, 아침을 깨우는 햇빛은 고요하기만 했다. 석진은 부은 눈가를 꾹꾹 눌렀다. 팔을 움직이는 바람에 깬 윤기는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살에 닿는 공기가 찼다. 석진은 두툼한 이불을 확 내리고 제 팔로 윤기를 덥혔다. 윤기는 마주 안는 대신에 몸을 더 기울여 안겼다. 둘의 숨소리만 방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윤기가 겹쳐진 몸을 떼며 석진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침대 옆에 놓인 거울도 한 번 쳐다봤다. 어제 베인 손가락의 피가 굳어있었다. 윤기는 다시 석진의 손가락을 한 번, 목을 한 번 더 쳐다봤다. 웃음이 나왔다. 우리 정말 똑같다. 석진이 큭큭거린다.
긴 손가락이 손을 감싸고 잡아당겼다. 석진이 침대에서 윤기를 끌어냈다.
“나가자, 우리.”
어제의 얇은 옷차림 그대로 밖에 나온 둘에게 찬바람이 쏟아졌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조금 걸으면 나오는 공터였다. 석진은 수도 없이 걸어왔던 오르막길 아래로 내려갔다. 한 손은 윤기의 허리로 향했다. 웬일인지 윤기는 피하지도,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석진의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윤기의 반응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닥의 잎들은 아직 노랗고 붉은 색들을 내뿜었다. 며칠 사이에 색을 잃은 낙엽들도 섞여 있었다. 여전히 하늘은 쨍한 파란색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가지들이 잎을 떨궜다.
둘은 가만히 벤치에 앉았다. 별다른 말이 오간 것은 아니다. 대신 손을 잡았다. 냉한 바람이 손바닥만큼은 피해갔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다. 주위와 대비되는 서로의 온기에 눈을 감은 채.
어젯밤 윤기는 끝까지 대답을 주지 않았다. 석진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 이후 단 한 번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석진 앞에서는 편했다. 여전히 눈빛이 스칠 때마다 안절부절 못하지만, 손이 닿는 곳마다 울렁이는 느낌조차도 편안했다. 어젯밤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자리를 찾았다.
둘은 다시 벤치에서 일어섰다. 갈 곳 없이, 이유도 없이, 그저 느릿한 걸음이 향하는 대로 걸었다.
“형.”
“응.”
“나, 대답 못 줘요. 아직은.”
“아...”
“미안. 그냥 너무, 복잡해서.”
“괜찮아.”
“형이 질리면 어떡해요. 나한테.”
“알잖아, 그럴 일 없는 거.”
언제까지 기다린대도 좋아. 석진이 웃었다. 밴드 하나가 붙은 손가락으로 윤기의 머리칼을 뱅뱅 감았다.
“나는 그냥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 형이랑 있을 때 행복해요.”
석진의 팔이 목으로 내려갔다. 연하게 미소를 띠던 표정이 이제는 진지했다. 윤기는 여전히 석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한 걸음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심장이 서서히 속도를 높여갔지만,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윤기가 석진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두 사람 사이에 빈틈이 사라졌다. 입술에 서로의 이름을 새겼다. 천천히 파고드는 혀에 눈을 감았다. 아찔하고도 행복했다. 기분 좋게 설레는 감정이 둘을 단단히 엮었다. 느리고 깊은 키스다. 맞닿은 둘의 가슴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진동으로 울렸다.
“사랑해.”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석진이 입 안에 속삭였다. 윤기는 대답 대신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어쩌면 윤기는 저가 원하는 것만큼 차가운 사람은 못 될 거란 생각이 스쳤다. 사랑받는 일을 피하려만 해도, 정작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어 하곤 했다. 윤기는 무뚝뚝하고 답답하게만 굴어도 결국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끝날 줄만 알았던 관계는 막을 내리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돌아오게 될 사랑이었다. 그게 석진이길 바랐다.
다시 한 번 불어오는 바람에 바닥에 쌓인 낙엽들이 흩어졌다. 몇 주 안에 내릴 눈에 파묻혀 죽었다가, 서서히 다시 피어날 잎들이 밟혔다. 마지막일줄 알았던, 모든 것이 죽어가던 계절이 아름답게 끝나갔다.
가을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도 결국 다시 돌아올,
Never Fall